
#1. 밍밍한 소고기 무국 같았던
30대 남자 대기업 연구원과의 소개팅
지난 1월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앞둔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권유로 소개팅에 나가게 되었다.
이직하게 될 직장이 예정 되어 있지만 아직 백수 신분이였기에,
소개를 받기 앞서 상대의 프로필을 들었을 때
'내가 소개 받는 게 맞을까?' 라는 부담감과 한편으로
친구의 말 처럼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보다
능력있는 사람이 낫다'라는 생각에 기대감이 동시에 마음속에 다가왔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소개를 받는 게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냥 만나만 보는 건데' 라는 마음으로 소개를 받기로 결심했다.
#2. 저.. 진짜 연애 할 맘 있으신거죠?
내가 먼저 주도한 첫 만남
일주일 뒤, 친구의 주선으로 소개팅남과 연결이 되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적당한 체격에 인상이 너무나도 좋은
소위 말하는 '부티 난다'는 느낌의 남성이었다.
서로에 대한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첫 연락부터 이어지지 않는 대화.
상대는 어떤 대답이든 단답으로 내가 할말 없게 만들었다.
보통 소개팅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이기에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와 같이
상대방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그는 전혀 나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알고 싶은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친구가 소개해 준 사람이기에
한 번은 만나보고 헤어지는 것이 맞을 것 같아
한 번 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랬더니 예의바른 그는
"아, 안그래도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 했는데.."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그렇게 그와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토요일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너무 괜찮았던 30대 소개팅남
좋았던 분위기... 하지만 애프터가 없었다.
이미 어느정도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연락을 통해 알기 때문에,
만나서 밥 한끼 먹고 헤어지자는마음으로
크게 외적으로 신경쓰지 않았다.
개성이 드러나는 에스닉 느낌이 나는 가디건을 입고
똥배가 그대로 드러나는 쫄쫄이 목티와 배바지 그리고
2년 세탁 안해도 티가 안나는 핑크 캐시미어 쪼금 섞인
모직코트를 입었다.
나는 안다. 내 개성대로 옷을 입으면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다는 것을.
만남은 토요일 약간 늦은 오후 서울의 가장 북적이는
지역에서 만났다.
프로필 속 느낌과는 달리 그는 사진보다는 날씬했고,
키는 나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잔잔하면서 부담감을 주지 않는 편안한 인상이였다.
주말인지라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그와 원래 가기로 했던 카페는 만석이라
근처 여러 카페를 돌다 한산해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나는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에게 조금 미안해 보였다.
음료를 시키고, 그와 대화를 나눴다.
카톡과는 전혀 달리 그는 유쾌한 사람이였다.
상대의 말에 경청할 줄도, 적당히 받아칠 줄도 알며
자기 할말도 하는 한 마디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걸리는 부분은
여전히 만나서도 상대방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직감이 쎄했다.
저녁을 먹고 상대방은 지하철역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느낌으로 알았다. ‘아 이렇게 끝나겠구나’
아쉽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3. 첫만남 후 다음날 다시 온 연락
정말 그 사람은 소심한 사람인걸까?
나에게 관심이 없어보였기에 다시 연락이 없을 줄 알고
나는 그의 마지막인사를 안읽씹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사람에게서 아침인사가 왔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남자가 소심해서 그런거야”라며,
이런 사람은 너가 적극적으로 먼저 만나자고하고 연락하면
잘 될 수 있을거라고 조언해줬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내가 궁금한 애프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또 만나요”
지난 번에 먼저 약속을 주선한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먼저 만나자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아침 그 사람은 알람처럼 정확하게
8:30분만 되면 아침인사를 나에게 보냈다.
매일 기계처럼 오는 인사에 마음이 서서히 지쳐갔다.
그래서 나한테 관심은 있는건지, 또 만날 의향은 있는건지...
연락을 2주 가까이 했지만 그 사람과 나는 서로에 대해
더 알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여전히 단답이고 여전히
루틴적인 얘기만 맴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침인사는 항상 그 시간에 정확히 왔다.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런 경우, 상대에게
소개팅녀가 나 뿐만 아니라 여럿 있는 경우도 있다하더라.
하지만 주선자 친구는 ”그럴리가 없다“며
상대방이 소심한거니 좀 더 적극적으로
너가 먼저 다가가보라는 조언만 해 줄 뿐이였다.
그렇게 서서히 지쳐갈때 즈음
상대방은 한 번 더 만나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4. 두 번째 만남,
영화는 보고 저녁은 안먹고? 쎄하다.
그렇게 만난 두 번째 만남
상대방이 5일을 뜸들이고 나서야 만나자고 제안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아,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였구나’
사실 조금은 들뜬 마음과 함께 김칫국도 마셨다.
상대방과 장거리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극복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약속 당일, 나는 첫 번째 만남과는 달리 신경쓰느라
약속에 15분 정도 늦었다.
철두철미한 그 사람의 성격을 보면 지각은 꽤 이미지에
치명타를 준 것 같다.
게다가 그 날은 갑자기 유독 추워진 꽃샘추위가 심한
날이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가고 그 사람이 봐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를 좋아하지만 복불복으로 배탈이 나는 경우가 있어
나는 마음과는 달리 모밀을 먹었다.
사실 식당의 음식 가격이 비싸서 적당해 보이는 가격으로
고른 것도 있다.
그날도 그렇게 그런저런한 대화를 하고 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
종교 얘기가 나오자 나는 눈치도 없이 ‘무신론’을 강조하며
종교가 왜 부질없는지 혼자 신나서 몇분을 내내 떠들었다.
생각해보면 상대방이 무교일지라도 이 부분은
그렇게 연설을 놓듯 떠들면 안돼는 부분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예매한 영화시간이 다가오자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는데 상대와 나는 그냥 친한 회사동료끼리
영화보러 온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사실 그냥 가기 애매하긴 했지만
할 게 없어서 서로 집으로 갔다.
저녁이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이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마지막 날에도 나를 역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갔다.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모습은 정말 감사하게 느껴질 뿐이다.
#5. 애프터 다음날,
거절의 메세지가 오다.
그리고 다음날, 항상 오던 아침인사가 오지 않았다.
느낌이 정말 쎄했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 단문의 메세지가
왔다.
“좋은 사람 같지만 연애의 감정이 안든다”고...
예의바르지만 설드할 수 없는 뼈를 때리는 그의 말에
예상은 했지만서도 당황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사실 좀 더 여지를 주는 마지막을 남겼을 수도 있지만
당시 충격이 컸던 지라 나는 그대로 수긍을 했고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조금은 훌훌 털어버렸지만서도
친구들 말처럼 적극적으로 할 껄이라는 늦은 후회와
‘그냥 인연이 아니였다’는 다소 현실적인 조언이 공존한다.
연애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건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건 노력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직장에 들어간 뒤 만났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아쉬움과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말처럼 그저 여러
소개팅 후보 중 한사람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그 사람과 잘 되지 않고 나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직업도 좋고 성격도 좋아서 주변에서 서로 소개해주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이미 전에도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고 잘 되지 않아 친구가 나도 소개시켜준거라고...
이 말을 듣는데 친구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 지...
내가 소개해 달란 것도 아닌데.
이번 소개팅을 통해 한 번 더 깨달은 것은,
역시나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게 맞다’
라는 결론이다. 그게 20대든 30대든 말이다.